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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 속의 종로는 87년의 그곳이다.

92년, 내가 대학 신입생을 겨우 면했을 무렵, 정태춘은 대학 시절 축제/행사의 단골 초대 손님이었고, 그는 "촛불"이나 "시인의 마을"이 아닌 "일어나라 열사여"를 외치며 북채를 휘둘러댔다. 스스로 "음유시인"이기를 거부하고 "노래하는 투사"가 되고자 했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 흘리지 않으리라, 물대포에 쓰러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이제는... 그 환멸의 시대를 건넜다고, 천박한 한 시대가 지나갔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봄날 초록의 언덕길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물대포에 쓰러지고... 군홧발에 채이고... 무시당하고... 또 매도당하며...

92년 장마, 종로에서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워, 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 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인간은 지나간 과오를 되풀이한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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