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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고 DVD들을 정리하다가 별의 목소리의 서플먼트로 들어있던 5분짜리 흑백 애니가 기억났다.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도와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봄이 시작되고, 그 날은 비가 왔다.

Sec 1 Introduction

그래서 그녀의 머리카락도 내 몸도 꽤 젖었다.
주변은 비의 아주 좋은 냄새로 가득찼다.
지구는 소리도 없이 돌고, 그녀와 나의 체온은 그 속에서 조용히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지금 집에 없습니다, 용건을 남겨주세요"
그 날, 그녀는 나를 주웠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고양이다.

Sec 2 그녀의 일상

그녀는 부모님처럼 다정했고 연인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난 금방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혼자 살고, 매일 아침 일하러 나간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
관심도 없어.
그렇지만 난 아침에 방을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주 좋다.
제대로 묶은 긴 머리 옅은 화장과 향수 내음 그녀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갔다올게' 하고 말하고는 등을 곧게 펴고 기분 좋은 구둣소리를 울리며 무거운 철제 문을 연다.
비에 젖은 아침 풀숲과 같은 내음이 잠시동안 남는다.

Sec 3 그의 일상

여름이 오고, 나에게도 여자친구가 생겼다.
새끼 고양이 미미다.
미미는 작고 귀엽고, 애교도 잘 부리지만, 그래도 나는 역시 나의 그녀 같은 어른스런 여자가 좋다.
"저기, 쵸비"
"응, 미미?"
"결혼하자."
"저기, 미미. 몇번이나 말했지만 내겐 어른인 애인이 있어."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만나게 해줘"
"안돼"
"어째서?"
"저기, 미미. 몇번이나 말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네가 어른이 돼서.."
어쩌고 저쩌고. 이런 이야기가 계속된다.
"또 놀러와"
"꼭 와"
"진짜 와야 해"
"진짜, 진짜로 와"
이런 식으로 내 첫 여름은 끝나고 점점 시원한 바람이 불게 되고...

Sec 4 그녀의 외로움

그러던 어느 날 길고 긴 통화 후, 그녀가 울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와 아주 긴 시간을 울었다.
잘못한 건 그녀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나는 늘 보고있다.
그녀는 언제나 누구보다도 착하고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살아간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도와줘.

Sec 5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끝도 없는 어둠 속을 우리를 실은 이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있다.
계절은 바뀌어, 지금은 겨울이다.
내게는 처음 보는 눈 내리는 모습도 훨씬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든다.
겨울의 아침은 늦기 때문에, 그녀가 집을 나서는 시간이 되어도 아직 바깥은 어둡다.
두툼한 코트를 둘러 입은 그녀는 마치 커다란 고양이 같다.
눈의 내음을 몸에 걸친 그녀와 그녀의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과 아득한 하늘의 검은 구름이 흐르는 소리와 그녀의 마음과 나의 기분과 우리들의 집 눈은 모든 소리를 들이마시지만 그래도 그녀가 탄 전차의 소리만은 막 일어난 내 귀에 들린다 .
나도, 그리고 아마 그녀도, 이 세계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나도 이 세상을 좋아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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